로마서 5장 6-11절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어떤 사람을 사랑해서 가슴 앓이를 해본 적이 있는가? 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잃어버렸고, 이 친밀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거나 가슴 아파하지 않는가? 이것이 죄로 인한 것인가?
먼저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언젠가 부끄러운 일을 해서 뒷걸음 쳤을 때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서 관계가 서먹서먹해진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넘어가 버린 것이 원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혹시나 떠오르는 죄의 문제가 있다면,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해결해 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신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발견 하기를 원합니다.
죄 때문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음에도 괜찮은 것 같다면 가능성은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을 처음 부터 사랑하지 않았다.
2. 하나님을 사랑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3. 혹은 하나님외의 다른 어떤 것을 사랑하고 있다거나, 그런데 위의 세 가지가 다 나의 경우에 속하지 않는다면
4. 나는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인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들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이 사랑으로 다가가는 데 머뭇거리고 자격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본문 6-7절의 말씀을 봅세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이 구절은 우리가 본래 영적으로 ‘전적 무능 (whole inability)’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므로 죄의 삯인 영원한 멸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로운 자를 대신해서 죽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인데, 하물며 불의한 자를 위해 죽는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리고 선인, ‘인정이 있고 친절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만약 이들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대신 죽고자 나서는 이들이 더러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간은 다분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 이어서 도움을 받고 은혜를 입을 때에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줄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입장이 바뀌면 등을 돌리고 안면을 몰수하는 경우들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악인을 위해 죽는 일이 어디 가능키나 한 일인가요? 기억합시다, 우리의 친밀함을 다시 얻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사랑하고 계신지를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로 작정하신 그 때가 바로 인간이 영적으로 전적으로 무능하여 스스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때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울은 ‘확증하셨느니라’로 번역된 ‘쉬니스테신’을 문장 앞에 두어 이러한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데,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드러내고 계신다’, ‘입증하고 계신다’가 됩니다.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친밀함을 상실하는 이유, 그것이 부끄러운 죄의 문제이든 어찌되었든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과연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 받고 싶은데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 구절은, 우리의 잃어버린 이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계속 9-10절의 말씀을 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을 선포한 9절의 내용을 다시 한번 재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현재 성도가 누리고 있는 두 가지 상태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된 것이고,다른 하나는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본절 상반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가 변하여 그분과 합하는 것이며,이는 곧 한 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한 생명과 영적 능력을 함께 나눕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 이상 진노의 대상이 아니며, 상태에 있어서 더 이상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마지막 11절을 봅시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칭의 받은 사람은 이미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보장받았다는 것이며,이것이 바로 칭의된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이유입니다. ‘즐거워하느니라’로 번역된 단어는 항상 즐거워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칭의된 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현재 상태의 변화와 더불어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데서 나오는 즐거움입니다. 따라서 현실 생활 가운데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결코 실망하지 않고 즐거움을 유지하며 구원을 보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이 힘을 가지고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미래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가운데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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