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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노트(Faith Notes)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게

by dj멀 202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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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99-15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게

 

밀정은 일제 강점기때를 그린 영화입니다. 조국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한 독립투사와 자신을 위해서 조국을 버린 소위 말하는 매국한 자의 이야기입니다.

 

왜 매국한 자와 독립투사는 같이 설 수 없었을까? 그것은 국가라는 가치가 다르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독립투사에게 국가는 자신의 모든것을 다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며, 매국한 자에게는 국가라는 가치는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를 들어서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우리 각자에게는 얼마나 소중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나에게는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교의 장이나, 사람을 만나 정보를 얻는 곳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자는 볼 것을 다 보았다고 생각하면 이것이 교회를 떠날 이유가 될지도 모릅니다. 교회를 자아실현의 장이나,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권력을 휘두르는 곳으로 생각하는 자는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교회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친구를 만나는 곳으로 생각하는 자는 교회 보다 친구를 만나는데 더 적합한 곳을 발견하면 이것이 교회를 떠날 이유가 될 것입니다.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떠한 가치가 있었을까?

 

바울은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복음을 사랑하였는가? 세상적인 가치로도 영적인 원리로도 마땅히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해 가며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9-12을 요약하자면, 바울과 바나바는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어떠한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를 거절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은 고린도라는 지역의 특수성을 알았기에 모든 종류의 곤궁함을 인내로 참았던 것이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이 있었으며, 그들로 인해서 복음이 잘못 전달 될 것을 막기 위해서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것을 자원함으로 포기한 것입니다. 어떤 주석에서는, 바울의 이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다른 사도들 보다 낮은 등급의 사도라는 오해를 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는 바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단심가를 잘 알 것입니다. 세상의 왕을 향한 마음도 죽고 죽어도 일편단심이라고 하는데,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주신 영원한 왕, 보이지 않으시고 썩지 않으시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어떠한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물론, 이방원이 대적자 사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우리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말을 들을 때 마음이 동하는 사람이 혹시 있지 않는가? 이 말을 들을 때 마음이 동한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바울은 16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 지라도 자랑 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것이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소명에 있어서 다른 사도들과 큰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2 사도들은 자발적인 믿음으로 그들의 소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완악한 불신앙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의 소명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강압적인 역사였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단지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바꾸신 그리스도와 성령께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주님의 계시와 마음에 민감하였고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였음을 시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신실한 사랑과 헌신에 보답해 주신 것을 우리는 그의 다른 글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에 따라서도 땀 흘려 수고한 자들에게 보상을 주는 것이 합당한 것이라면 하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눈물과 피를 흘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지 않으시겠는가?

 

물론 바울은 보상을 바라고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을 향한 자원하는 충성과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수고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의 전직인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과 은혜의 기억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을 못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의 정체성인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자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신부요, 지체인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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